모리 가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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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가쓰노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규슈 정벌과 히고 호족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부젠 고쿠라 6만 석을 받았으며, 고쿠라성을 축성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잃을 위기에 처했으나,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도움으로 도사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61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소는 고치현 고치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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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당주이자 히노에 번 번주였으며, 가톨릭 개종 후 덴쇼 소년사절단 파견, 임진왜란 참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강화와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모리 가쓰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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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모리 씨 → 모리 씨 |
이름 | 모리 가쓰노부 / 모리 요시나리 |
개명 | 모리 요시나리 → 모리 가쓰노부 |
별명 | 요시나리, 통칭: 이키노카미(壱岐守), 호: 이쓰사이(一斎)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생몰 | 생년 미상 ~ 게이초 16년 5월 6일(1611년6월 16일) |
묘소 | 고치현 고치시 친센지(秦泉寺) |
계명 | 하쿠운인덴 코세츠신키(白雲院殿好雪神祇) |
관위 | 종5위 이키노카미 |
가문 | |
씨족 | 모리 씨 |
가몬 | 두루미 고리 |
가몬 설명 | Japanese crest Turu no maru(White background).svg |
가족 관계 | |
형제 | 가쓰노부, 요시오(吉雄, 키치에) |
자녀 | 가쓰나가(吉政), 요시치카 외 |
주요 경력 |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2. 생애
모리 가쓰노부(毛利吉成)는 미노국(尾張国)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오미국(近江国) 나가하마시(長浜)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3] 또한 미노국 하쿠리군(葉栗郡)의 만다라지(曼陀羅寺)를 본찰로 하는 모리(森) 일족이라는 설도 있다.[5] 아우로 모리 요시오(毛利吉雄)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규슈 정벌, 임진왜란 등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성을 공격했으나, 패전 후 영지가 몰수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탄원으로 도사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611년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묘는 고치현 고치시에 있다.
2. 1. 도요토미 가신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랜 가신으로, 황모의중(黄母衣衆)의 한 사람이었다. 규슈 평정에 참전하여 시로이야성(城井谷城) 공략 등에 참여하였다. 히고 국인 일기(肥後国人一揆)에서는 주모자인 쿠마베 치카야스(隈部親安)와 카이 치카히데(甲斐親英)를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다.[6] 1587년, 부젠국(豊前国)의 2개 군(규규군(規矩郡), 다카우군(高羽郡)), 고쿠라성(小倉城) 6만 석을 하사받았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모리(森) 성을 모리(毛利) 성으로 개명하라는 명을 받고 모리 이키노카미(毛利壱岐守)라 칭하였다.분로쿠 원년 임진왜란 때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제4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휘하 장수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이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규슈 남부 세력과 함께 강원도로 진군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명과의 강화 교섭 중 임랑포왜성을 쌓아 조선 남부에 주둔하였다.
게이초 2년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 가쓰나가를 따라 출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전주 회의 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군했고, 이후 정읍 회의에 참석한 좌군 여러 장수의 건의에 따라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으로 귀환하던 중 사천 선진리왜성을 축성하였고, 성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쓰노부 자신은 부산에 진을 폈다. 연말부터 전투가 시작된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고, 이후 서생포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 히데요시의 죽음에 임하여 유물 금 20장을 받았다.[7]
2.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 때 모리 가쓰노부는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제4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휘하 장수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이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규슈 남부 세력과 함께 강원도로 진군하였다.[3] 조선 남부에 주둔하면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명과의 강화 교섭 중에는 임랑포왜성을 쌓았다.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 가쓰나가를 따라 출진하여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전주 회의 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군했고, 이후 정읍 회의에 참석했다. 좌군 장수들의 건의에 따라 모리 가쓰노부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부산으로 돌아가던 중 사천 선진리왜성을 축성하여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쓰노부는 부산에 진을 폈고, 연말부터 시작된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으며, 이후 서생포왜성에 머물렀다.[3]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몰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랜 가신으로 호로 7인방 중 한 명이었다. 규슈 정벌과 히고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부젠 고쿠라 6만 석을 받았다.[6]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 때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 제4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을 휘하에 두고 조선에 건너왔으며, 시마즈 요시히로 등 규슈 남부세력과 함께 강원도로 진군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고, 명과의 강화 교섭 중 임랑포왜성을 쌓아 조선 남부에 주둔하였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 가쓰나가를 따라 출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전주회의 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군했고, 이후 정읍회의에 참석한 좌군 여러 장수의 건의에 따라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으로 귀환하던 중 사천 선진리왜성을 축성하였고, 이 성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쓰노부 자신은 부산에 진을 폈다. 연말부터 전투가 시작된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고, 이후 서생포왜성에 머물렀다.[7]
임진왜란 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세해 후시미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 후 영지가 몰수되고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몰리지만, 예부터 사이가 좋았던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탄원에 의해 가즈토요의 도사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8]
2. 4. 도사번에서의 만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탄원으로 도사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모리 부자의 신변은 가토 기요마사가 돌보았고, 이후에는 과거 구면이었던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도사국(土佐国)에서 보호하였다. 이는 도요토미 가신 시절 상관이었던 가쓰노부가 가쓰토요를 보살폈고, 아들 가쓰나가가 이시다 미쓰나리 측에 있으면서도 가쓰토요의 아내 겐쇼인 보호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도사번에서는 오타카사카성 서곽(大高坂城西郭)에서 생활하였으며,[8] 가쓰토요에게 등용되어 성 건축에도 참여하였다.[8]게이초 16년(1611년) 5월 6일[9],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다음 날, 오다카사카야마(小高坂山)에서 화장되어 오토야마(尾戸山)에 매장되었다. 묘비는 9척 사방 크기로, 야마우치 타다요시가 건립하였다. 묘소는 처음에는 에노구치 오토야마 호케종(江ノ口尾戸山法華宗) 키엔보(喜円坊)에 있었으나, 후에 구만촌(久万村)으로 옮겨졌다.[1]
3. 가족 관계 및 후손
- 모리 코벤[10] - 미크로네시아 연방 추크 제도에서 활약한 실업가이다.
- 매니 모리[11]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제7대 대통령이다.
- 모리 요시모리 - 에도 시대 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친 도사 번 무사이다. 아우인 모리 요시오(데와노카미)의 자손으로, 오마와리야쿠 250석, 후에 교토 유슈이야쿠를 거쳐 신정부에서 시즈오카현 참사를 지냈다.
- 모리 료타로 - 돗토리 대학 명예교수이자 농학자이다. 저서로 「우에노야키 존가이 도라이의 연구―모리 요시나리설의 확립」이 있다.
3. 1. 모리(毛利) 성씨에 대하여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모리 요시아스(毛利吉安) 형제 등이 모리 성(毛利氏)으로 바꾸었지만, 모리 다카쓰구(森高次)의 두 아들과 그 일족, 가쓰노부(勝信)의 계보와의 관계는 불명확하다. 이들은 모두 오와리(尾張) 출신으로 동족 또는 근연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모리 노부토모(毛利信友)도 친족으로 생각되지만, 혈족 관계는 불명확하다.참조
[1]
서적
真田より活躍した男 毛利勝永
宮帯出版社
2016
[2]
문서
守矢家文書
[3]
서적
真田より活躍した男 毛利勝永
宮帯出版社
2016
[4]
서적
真田より活躍した男 毛利勝永
宮帯出版社
2016
[5]
서적
真田より活躍した男 毛利勝永
宮帯出版社
2016-08
[6]
서적
熊本市・飽託郡誌 : 附県下名都名勝
名著出版
1974
[7]
서적
1981
[8]
서적
真田より活躍した男 毛利勝永
宮帯出版社
2016
[9]
서적
1981
[10]
웹사이트
南の島が沈んでゆく
http://www.hiroshima[...]
[11]
웹사이트
在ミクロネシア日本国大使館:モリ大統領、高知を訪問
http://www.micronesi[...]
200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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